4. 중세인의 삶과 기독교
과거에 신은 믿는 개념이 아니었다.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과거에 신을 부정하려는 것은 마치 오늘날 과학을 부정하려는 것과 같았다. 너무 당연해서 다른 소리를 하면 어이가 없지 않나.
우리는 종교라는 단어를 오늘날의 의미로 인식하면서 중세의 종교를 ‘선택’이자 ‘믿음’의 개념으로 볼 때가 많다. 하지만 중세의 종교는 믿음이 아닌 상식이자 진실이었다.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은 기독교도였다. 본인이 인지하고 있든 아니든 당연히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인이었고 기독교를 믿는다고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중세 유럽은 신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4-1)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중세의 세계관은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신의 뜻인데, 모든 자연현상이나, 전염병,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전부 신의 뜻이자 계획이었다. 중세의 법이란 신의 뜻을 말과 글로 옮긴 것에 불과했다. 심지어 인간이 무슨 선택을 하고 행동을 해도 그건 모두 신이 이미 정해둔 길이다. 중세는 종교를 기반으로 한 결정론적 세계관의 시대였다.
왕과 황제가 화산이나 전염병 같은 것들을 보고 신의 뜻으로 해석해서 내렸던 결정을 바꾸기도 했다. 전쟁이나 흑사병 같은 전염병은 신의 분노로 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왕이나 황제가 교회의 축복을 받으려는 것도 그것은 신이 왕을 인정했다는 뜻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황의 도유식 같은 게 있으면 왕권이 강화되는 것이었다.
중세에는 결투가 '공정한 재판'의 수단이었는데, 이길 사람을 정하는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닌 신이기 때문이었다. 강한 사람이 이기는 게 아니라 신이 선택한 사람이 이긴다는 개념이다. 이것은 유럽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서 훗날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결투로까지 이어졌다. 중세의 투표나 선거는 만장일치여야 통과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결정이 되는 건 신의 뜻이기 때문에 결정될 만한 것은 당연히 만장일치가 된다는 논리였다. 실제로는 설득과 논의만이 아닌 뇌물과 폭행, 협박, 납치와 감금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모든 것 또한 신의 뜻이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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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결투 재판. 비슷한 논리의 재판이 종교계의 그 악명 높은
'묶고서 물에 빠트리기', '달군 쇠를 맨손으로 쥐기' 같은 신명재판이다.
단지 이런 종류의 재판은 당대에도 문제점을 인지하고 금지하기도 해서
중세 내내 무차별적으로 행해졌던 것은 아니다. 결투는 뿌리 깊긴 했지만...
생노병사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병에 들어 죽는 것은 그자가 죄인이기 때문이었다. 사고로 죽는 것도 그의 죄 때문이다. 아기가 죽는 것은 신의 품으로 일찍 돌아간 것이었다.
이런 개념들을 당대 사람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믿었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어떤 자들은 덜 믿기도 했을 테고, 어떤 권력자들은 믿지는 않지만 교리를 이용해서 이득을 보려고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세의 수많은 기록들, 사람들의 행동들을 보면 중세는 실제로 이런 가치관 아래에서 움직였다. 온세상과 모든 사람이 어떤 것이 맞다고 하면, 사람은 그걸 거짓이라고 여기기가 힘들다. 특히 반론할 만한 배경지식조차 없을 때에는 말이다. 오늘날에도 쉽게 선동당하는 대중이란 집단을 보자.
(4-2) 기독교와 인간의 원죄
기독교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추방당한 후로, 인간은 태어난 것만으로 원죄를 짊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태어난 것만으로 죄인인 인간은 신의 은총을 얻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일생 동안 노력을 해야 했다. 중세 시대에 힘든 삶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은 "그게 신이 너희에게 주신 운명이니까. 인간의 원죄이니까."였고,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였다(안 그러면 어쩔 건가.).
금단의 열매를 먹고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
인류는 원죄를 짊어지게 됐다.
중세의 농민은 힘든 삶을 살았다. 봄여름가을에는 뼈 빠지게 일하고 겨울엔 추위에 떨었다. 집 안에서 가축이 함께 살고 짚단 위에서 잠들었다. 흉년이 들면 끼니를 걱정해야 했고, 형제자매나 자식들, 부인은 각종 질병이나 사고로 매우 쉽게 죽었다. '땅을 소유한 상류층'조차도 평균 수명은 33살이었으며(10살까지 생존하면 40~50살까지 늘어난다) 태어난 아이의 1/3은 첫 해에 죽었다. 농민은 돈이 있어도 귀족과 같은 옷을 입지 못했고, 같은 죄를 지어도 더 잔혹한 처벌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중세를 설명하는 학자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당시 사람들은 운명을 받아들여 순응했고, 죽음이란 삶의 골인 지점이었다는 식의 설명을 자주 볼 수 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적어도 우리보단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훨씬 잘 알 것이다.).
다음은 독일 보훔대학의 교수였던 페르디난트 자입트 저(著)의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에 소개된 일화다.
| 1300년 경 트림베르크의 성직자 후고가 길을 걷는데 어떤 마을에서 농부들에게 둘러싸였다. 농부들은 후고에게 "우리는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어째서 당신은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후고는 성서의 구절을 인용해서 대답했다. "너희들은 아버지 노아가 저주하여 노예로 정해진 함의 후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은 노예여야만 한다." 농민들은 후고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지식을 알고 있다고 믿었고, 성서에 적혀 있는 대답을 듣고 만족했다(고 한다). |
비웃으며 미개하다고 말할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인과 중세인의 뇌는 다르지 않다. 21세기 인류가 10세기 인류에 비해서 무슨 '진화' 같은 걸 한 게 아니다. 그냥 사회가 더 발전했을 뿐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한국인이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했으니까'라며 평생 남의 사업체에서 일하다가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삶을 납득하지 않나. 애초에 납득하지 않으면 어쩔 건가? 농민으로 태어난 운명인 것을. 너무 궁지에 몰리면 목숨을 걸고 싸워 볼지도 모르지만 대다수의 통치자들은 그렇게 가혹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았다.
사실 중세 농민의 삶을 얘기할 땐 생각해 봐야할 게 있다. 일단 현대에 비해서 중세라는 시대 자체가 인권 개념이 없고 전반적인 생활 수준과 복지가 형편없었던 것은 맞다. 단지 그게 일부러 그들을 못 살게 굴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사회의 평균치 자체가 그랬다. 행복은 상대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배고픔과 병마에 시달리고 신분에 따른 불공평한 삶을 살았다면 그게 세상의 당연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농민들도 나름의 행복과 불행을 겪으면서 살았고, 좋은 통치자의 아래에서 평화 시기에 살았다면 굉장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4-3) 중세인의 삶과 죽음
교회는 신을 섬기고 신실한 생활을 하며 은총을 얻고 죽으면, 훗날 최후의 심판 때 무덤에서 일어나 신의 곁 낙원으로 갈 것을 보장했다.
중세에는 농민조차 하루에도 5번씩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건 흔한 풍경이었다고 한다. 신앙 생활은 일과의 일부였으며, 죽음이란 해방이자 도달점이었다. 이것은 더 편하게 생활했지만 더 독실했던 지배층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사는 성물을 증인으로 삼아 충성의 맹세를 했다. 기사의 의무에는 예배가 포함되어 있었다. 영주나 왕의 성 안에는 전용 예배당이 따로 있었고, 사제는 항상 권력자의 주위에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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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세기 사이에 건설된 샤르트르 대성당.
죽음이 다가올수록 권력자들은 사후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랬기에 안식과 속죄를 위해서 교회에 큰 돈을 기부했다. 고위 귀족은 거금을 들여서 묘자리를 마련하고, (자신이 묻힐) 대성당을 건축하기도 했다. 기사들 역시 큰 돈을 기부하여 묘자리를 마련하거나, 말년에 수도원에 들어가서 독실한 생활을 했다. 교리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십자군에 동원된 기사들의 가장 큰 동기 중 하나는 참가하면 모든 죄가 없어진다는 선언이었고, 면죄부가 등장한 이후에는 교회의 부패가 극도로 치달을 정도로 고위층이나 부자들이 열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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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부터 관 뚜껑 장식으로 유행한 횡와상(gisant).
안식에 든 채로 부활을 기다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오늘날 유추해 보기를, 중세의 지배층이 더 확고하게 기독교를 믿었고, 농민의 생활은 민간 신앙에 더 기초를 두었던 것으로 여긴다. 비록 농민들이 성직자의 설교를 모두 마음에 들어했던 건 아니었지만, 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말이다.
(4-4) 기독교와 민간 신앙
이런 기반 위에서 기독교는 중세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통적인 민간 신앙과 풍습 혹은 이교의 신들을 마귀, 악마, 요정 등으로 몰아서 금지하고자 했다. 존경받던 왕이나 지역 유지가 죽으면 성인으로 추대해서 기독교의 행사로 끌어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애지 못한 신앙과 풍습들은 기독교에서 받아들였다. 이교의 신들의 이름을 딴 달과 요일의 이름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장례 등에선 이민족 풍습을 받아들였다. 봄 축제는 부활절이 되었고, 꽃의 여신을 숭배하던 5월제는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날이 되었으며, 동지의 태양신 축제는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제일 재미있는 것은 연옥이란 개념의 탄생이다. 원래 기독교는 최후의 심판과 관련된 교리 때문에 유령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인간은 사후에 가만히 묻혀서 심판을 기다리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과 유령의 등장을 끊임없이 믿었고, 결국 영혼이 고통받으며 속죄하는 장소인 연옥이란 개념이 나오고 나서야 카톨릭은 유령의 존재를 합리화시킬 수 있었다. 연옥에 있는 유령은 인간 세상에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단 것이다. 연옥은 이후 매우 쏠쏠한 수익원이 되는데, 필자가 보기에 중세 기독교가 만들어 낸 가장 성공적인 개념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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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purgatory)은 천국에는 못 가지만 죄가 비교적 가벼운 자들이
최후의 심판 전에 고통받으며 죄를 정화하는 장소이다.
죄를 모두 정화한 후엔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13세기 무렵에는 기독교가 민간 깊숙한 곳까지 성공적으로 침투한다. 웬만한 이교도 신앙들은 앞서 말한 과정을 거쳐서 융화시키거나 쳐냈다. 그리고 교회법이 정립되면서 일반인의 인생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게 됐다. 세례, 고해성사, 결혼, 장례와 같은 개인의 삶에 대한 성사들이 교회의 주관으로 바뀌고, 의무화되었다. 작은 교구의 성직자들은 재량을 발휘해서 마을 주민들을 포용하면서 종교적 지도자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5. 무신론자도 있었다.
하지만 중세에도 무신론자가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중세 사람과 현대 사람은 신체적으로 다르지 않다. 단지 자라고 배우고 살아가는 환경이 다를 뿐이다. 지식인 층에서도 신이 없다고 말을 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고, 농민들조차도 신이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단지 현대 (한국) 사회에 무신론자가 훨씬 많다면, 중세 유럽 사회에는 거의 없었을 뿐이다.
의외로 12~13세기 이전까지는, 혹은 중세까지는 교회가 무신론자나 이교도에 대해서 관대했던 것 같다. 특별히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거나 어떤 계기가 없는 한, 만화에서처럼 숨은 이교도까지 찾아다니면서 무조건 다 죽이거나 하진 않았다고 한다. 이교도에 대해 민감해지는 것은 흑사병 이후라는 의견도 본 적은 있는데, 이건 신뢰도가 떨어지는 이야기이니 참고만 하자. 가능한 얘기이긴 하다. 실제로 마녀 사냥은 중세 이후에 행해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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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의 의사 파라켈수스. 무신론자는 아니다.
샐러맨더, 놈, 운디네, 실프라는 4대 정령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사람이다.
정령을 좋아하는 사람은 파라켈수스에게 감사하자.
이렇게 중세에 무신론자가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현대의 무신론자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세상이 사대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에테르가 세상의 근본이라고 주장한 건 다름이 아닌 과학자들이었다. 중세의 의학서에는 질병의 원인이 엘프 때문이라고 나오기도 했다. 중세가 끝난 이후이긴 하지만, (오늘날 판타지의) 정령이란 개념을 확립하고 사대정령을 만들어낸 사람 역시 의사이자 과학자였다.
대부분의 지식인과 과학자가 유신론자라는 것을 제쳐두더라도,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자라온 환경의 영향 하에 놓일 수밖에 없다. 신을 믿지 않는 자, 남들보다 더 실용적인 삶을 원하는 자들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들이라고 현대의 우리와 같은 세상을 바라보았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미래의 인류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와는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볼 것처럼 말이다.
6. 마치며...
오늘날 우리가 중세의 삶을 상상하는 건 쉽지않다. 정말 신실한 사회였다면 광신도 집단 사회를 보는 느낌일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하자니 기록은 또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람들의 마음 속을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당시의 사회가 저렇게 돌아간 것은 확실하다.
이것들 외에도 현대 과학이 인정하지 않는 수많은 개념과 학문들이 중세에 존재했다. 관상, 천문학, 점술, 마술 등등... 의외로 중세 유럽에는 과거에 중국이나 동양 사회에 있었을 법한 개념들이 많다. 별을 보고 미래를 점친다거나, 관상을 본다거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서 (주문이란 이름의) 노래를 부르는 주술적 풍경을 보면 한국의 설화가 생각날 때도 있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달까.
우리가 오늘날 '판타지'라고 받아들이는 상상의 개념들은, 중세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던 '현실'이었다. 약간 다른 건 있는데, 판타지의 다양한 괴물이나 미신들 중엔 중세가 끝난 이후 생겨난 것들도 매우 많다. 이유는 교회가 십자군과 흑사병 이후 힘을 잃고 르네상스가 되면서 민간 신앙의 시대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중세가 끝난 후 괴물, 요정, 마법들은 오히려 더욱 다양해지고 체계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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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과 72악마로 유명한 마도서 『솔로몬의 소열쇠』 또한
원본은 중세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환상적 개념이 지배적인 세계관은 크든 작든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새로운 기술이 발견되고 과학적 이론이 하나씩 나오면, 관련된 민간 신앙도 하나씩 무너지며 미신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믿음들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판타지 소설에서 과거 시대에 나오는 인물들은 현대의 우리와 같은 세상을 바라볼 수가 없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기반 지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은 그저 껍질만 중세 유럽인 현대인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라고 밖에 볼 수 없어서 종종 아쉽다. 특히나 21세기에서 온 주인공의 의견에 너무 쉽게 설득되고 납득한달까. 평생을 쌓아온 당연한 상식들이 부정당하는데 말이다.
심지어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신이 존재한다는 물질적인 증거가 없지만, 판타지 세계는 신의 실존이 매일같이 증명되는 세상이다. 어떤 경우는 신과 실제로 대화를 하지도 않나. 그곳 사람들의 가치관은 우리와는 정말로 근본적으로 다를 것임에 분명하다. 모든 면에서.
중세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볼 때, 당대의 사람들의 세계관(世界觀)을 한 번쯤 떠올려 보면 좋겠다. 앞으로의 연재에서도 말이다. 우리가 현대 사회를 이야기할 때 군복을 입고 소총을 쏘는 것이 이 시대의 대표적 정체성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자유, 평등, 인권, 자본주의 같은 게 더 중요하지 않나. 중세 역시 기사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탄 것보다 더 중요한 본질이 있다.
부록. 세계관(世界觀)이란 단어의 의미
게임에서 오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세계관이란 단어가 '세계 설정'이란 식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이건 엄밀히 말해서 틀린 뜻이다. 궁금하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세계관'이라고 검색해 보자.
세계관(世界觀)이란 단어는 '세계(世界)를 바라보는 관(觀)점'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a view of the world".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염세적인지, 이상적인지, 어떻게 보이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관'이 쓰이는 비슷한 용법으로 가치관, 윤리관, 종교관 같은 말들이 있다. 너무 오용이 많이 돼서 이제 그러려니 하는 단어이긴 한데, 말이 나온 김에 진짜 뜻은 다르다고 한번 얘기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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