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 시리즈 2부. 프린스에 이어서 '대공'으로 번역되는 다른 역사 속 작위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설명하는 Archduke와 Grand Duke는 이름에서부터 '대단한' 공작위들이지요.
3. 합스부르크 가문의 Archduke
중세가 끝나기 약 100년 전인 1358년. 오스트리아에서 독일어 erz(최고)와 Herzog(공작)란 말이 합쳐진 Erzherzog(최고 공작 : 대공)이라고 부르는 작위가 탄생한다. 영어로 번역된 Archduke[ɑːtʃˈdjuːk]라는 작위명으로 더 유명한데, 첫 번째(Arch : primary) 공작(duke)이라는 뜻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본래 영세한 귀족이었지만 시류를 잘 타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다시 말하지만 황제는 선거로 선출했다). 이후 이 가문은 오스트리아를 먹고 승승장구하여 나중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거의 독점하는 유럽 최고의 명문가의 하나로 등극한다.
Archduke는 이 긴 여정 중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한 번은 해 봤지만 아직 날아오르지는 못한 시절 얻은 작위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공작이었던 루돌프 4세는, 한 번 더 도약하기 위해서 우리 가문은 사실은 대공작(Archduke)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러고서 위조한 문서를 작위에 대한 근거로 내세우는데, 당대의 황제였던 카를 4세와 딜을 해서 공식적으로 Archduke라는 작위를 얻어낸다. 가끔 인터넷에 '대공이란 작위는 실제론 없었다'라는 말이 보이는 건 이렇게 위조로 시작된 작위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https://www.wikipedia.org/)
승리의 루돌프 4세.
합스부르크 가문이 생물학과 유전에 대해서 일찍부터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당대에는 Archduke라는 작위를 주변에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중세가 지난 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국 최고의 가문이 되었고, 누구도 Archduke라는 작위를 무시하지 못하게 됐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의 안에 있었기 때문에 Archduke 역시 제국의 작위였다. 황제의 바로 아래, 공작보다 대단한 대공작. 판타지 소설 속의 대공에 딱 어울리는 작위이다.
하지만 Archduke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점한 작위였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국 황제를 독점하면서 사실상 황제가 동시에 가진 작위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었다는 면에서 판타지 소설 속의 대공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애초에 중세가 지난 이후에 확고해진 작위이기도 하고 말이다.
4. 동유럽과 러시아(Rus)권의 Grand Duke
Archduke와 함께 특정 범위 안에서 주로 사용되는 대공 작위로 Grand Duke가 있다. 이름만 봐도 알겠지만 '대단한 공작'이다.
본래 동유럽과 러시아권역에서는 본래 여러 부족의 통치자나 작은 권역의 군주를 칭하는 칭호(Великий Князь)가 있었는데, 슬라브어 Князь(knjaz)는 king에 가까운 말이었다. 동유럽 지역은 부족국가에 가까운 형태가 오랫동안 이어졌기에 서유럽의 프린스(Prince) 개념에 해당하는 지배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원래의 뜻은 Grand King/Ruler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나중에 번역하는 과정에서 Grand Prince 혹은 Grand Duke로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Великий Князь → | [ 서쪽 동네의 용어 ]Duke : 공작/공국(Duchy)을 다스리는 자
Prince : 작은 군주/왕자/공작
Fürst : 군주/공작~후작 | → |
Grand Duke
Grand Prince
Großfürst |
흔히 쉽게 '중세 유럽'이란 하나로 생각하지만,
서로 다른 언어로 번역되며 혼란스러운 걸 잘 보여주는 것 같다.
(4-1) 중세의 Grand Duke
Великий Князь는 11세기에 러시아(Rus)에서 사용되며 왕가의 아이들에게 주는 칭호가 되었다. 이게 나중에는 영어권에서 Grand Duke로 번역된다. Grand Duke는 후에 러시아 황가에서도 계속 황가의 일원을 위한 명예 작위로 사용했다.
로맨스 판타지(이후 로판)에서 왕의 형제들은 전부 대공이라 불리는 경우와 상당히 비슷한 개념이다.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https://www.wikipedia.org/)
러시아권의 첫 차르. 이반 4세.
북유럽에 있는 리투아니아의 통치자 역시 전통적으로 대공(didysis kunigaikštis=Grand Duke)이라고 불렸다. 이 칭호는 13세기 민다우가스(Mindaugas) 대공부터 시작되었는데, 리투아니아가 왕국이 되지 못한 이유가 재미있다. 리투아니아는 기독교 입장에서 이교도였고, 개종을 하지 않았기에 교황이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어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Grand Duchy of Lithuania)이라고 번역된다. 하지만 리투아니아 대공은 왕과 완전히 같은 존재였다.
이런 식의 독립 국가로서의 대공국은 판타지 창작물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는데, 이유는 동양인이 쓰는 판타지 소설은 결국 동양적인 선입관을 따라가기 때문으로 보인다. 왕이라 불리지 않지만 실제로는 왕국이라는 것은 동양에선 상식적이지 않다. 사실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 속 '중세'는 옛 중국과 매우 흡사하다. 중국의 시스템에 유럽의 껍질을 씌웠다는 느낌이다.
(4-2) 중세 이후의 Grand Duke
Grand Duke라는 이름이 서유럽의 공식 작위로서 처음으로 등장한 건 중세가 끝난 1569년,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 대공국(Granducato di Toscana)이었다. 토스카나 대공국은 14세기 피렌체 공화국이 뿌리인데, 1532년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공국이란 명함을 인정해준다. 1569년에 대공국이 된 후 1737년 신성로마제국 황가에 사실상 흡수된다.
16세기 후반부터는 Grand Duke가 북유럽과 동유럽, 러시아권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는 Grand Duke가 계속 황가의 핏줄의 명예 작위로 남았고, 서유럽에서는 나폴레옹 1세(1804-1815 재위)의 동맹들이 대공(Grand Duke) 작위를 얻었다가, 나폴레옹 몰락 후에는 낮은 군주 등급으로 격하되었다. 사실 로판에 등장하는 많은 요소들이 17~18세기 이후의 것들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로판의 대공은 여기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5. '대공'이란 번역어와 역사속 지위
대공은 오등작처럼 정말 '편한 번역명'이다. 각각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대공이란 단어가 그럴듯 해 보이는데, 전체를 통합해서 보면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탕이다.
오늘날 '공/대공' 안에서 등급을 나눌 경우 보통 Archduke가 가장 높고, Sovereign prince와 Fürst가 가장 낮다고 본다.
신성로마제국 : Archduke. 황제 가문(합스부르크)의 독점 작위.
독립 대공국 : Grand Duke. 사실상 왕.
제국 안의 대공국 : Grand Duke. 황제의 아래, 공작의 위.
나폴레옹 이후의 Grand Duke : 중급 군주.
러시아 : Grand Duke. 왕가/황가의 핏줄.
영국/프랑스 : Prince. 왕가의 작위.
공국(Duchy) : Duke. 고위 귀족.
공국(Principality) : Prince/Fürst. Duke 아래 고위 귀족.
대략 정리해 보면 이렇다. (* 왕권이 강했던 영국의 공작령과, 전통적으로 대귀족이 강력했던 프랑스, 연합체인 신성로마제국 안에서의 공작령은 통치권 개념이 다르다. 위에서는 그냥 편의상 Duke라는 용어로 통합했다.)
단지 이건 유럽 전체를 통합해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등작처럼 근현대로 계속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이 서로 교류하고 전쟁하고 남들과 비교하고 말을 번역하고 하면서 작위의 개념이 서로 비슷해지고 서열을 나누게 된 것 같다. 현실적으로는 남의 나라 귀족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국제 관계는 언제나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이니 저게 진정한 의미의 '전 유럽 서열'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된다.
시대의 흐름을 봐도 지위가 계속 변한다. 중세 말의 Archduke는 최강자로 비상하기 전이었고, Prince 계열이 메인이었으니까. 나폴레옹 전성기만 해도 Grand Duke가 좋아보였지만 나폴레옹 몰락과 함께 망했다.
6. 마치며...
사실 판타지에서 '대공'은 그냥 '최고 귀족'이라는 의미와 동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역사 소설이 아닌 창작 소설이 완벽한 고증을 따를 필요는 전혀 없다. 작가가 스스로 자유롭게 설정하고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고 합리적 세계가 만들어졌다면 그걸로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문제가 되는 건 이걸 실제 역사와 착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독자가 아닌 작가라면 유럽과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다르기 때문에 확실하게 설정하고 설명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말이다. '대충 중세 유럽이다'라고 말하고 넘어가면, 그때부터 독자는 시대 배경을 파고들고 작가는 고증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처지가 된다. 왕의 입장에서는 자치권을 가진 귀족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존재이다. 공국이란 소재는 매력적이지만, 함부로 남발하면 '대체 왜 저 상황에서 대공과 공국을 만들었나?'라는 설정 붕괴가 따라올 수도 있다. 독자들의 매의 눈이 감시하고 있다. -_-+
실제 역사 속 대공은, 오등작도 그랬지만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다. 서로 출발점이 다르고 문화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근대쯤 오면 비슷해지는 것이고...
어쩌다 보니 작위에 대해서 계속 얘기하게 됐다. 원래 한 편이 무난했는데 괜히 나눴나하는 생각도 든다. 뭔가 대공편은 처음 떠올렸던 것과 다른 종류의 글이 된 것 같다. 흠. 나중에 좀 더 머릿속에서 명확하게 정리가 되면 이 두 편은 리뉴얼을 할 지도 모르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