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판타지를 보면 대개 강력한 제국이 존재하고, 주인공은 황제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제국은 주변 국가를 위협하는 매우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이고, 그 정점에 서 있는 황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죠. 마치 중국의 황제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판타지에서 말하는 중세 유럽 시대를 보면 중국처럼 강력한 제국과 황제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황제를 투표로 선출했고, 봉건제 하에서 힘이 분산되어 있는 연합체인 영방국가(領邦國家)였죠. 중세 유럽을 얘기할 때 잘 언급되지도 않는 동로마 제국 역시 7세기 이후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옛 영광만을 쥐고 있었습니다.
지난 오등작과 대공에 이어서, 이번엔 실제 역사에서 황제의 존재가 대체 뭐였는지, 그리고 황제가 대체 무슨 뜻이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길어졌는데 제대로 얘기하려면 전체적인 걸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2부로 나눕니다. 2부는 토요일에 올라옵니다.
1. 동양의 황제(皇帝)
중국의 세 번째 왕조인 주나라(周, BC 1046-BC 256)의 힘이 쇠하면서, 전국의 제후들이 패권을 다툰 춘추전국시대(BC 770-BC 221)가 펼쳐졌다. 500년이 넘는 혼란기의 끝에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하나였던 진(秦)나라 왕 영정(嬴政)이 기원전 221년 중원을 통일하며 최초의 통일된 중앙집권국가를 세웠다. (이전의 주나라는 봉건제 국가였다.)
진왕(秦王) 영정은 중원 각지에 난립하던 왕들보다 더 높은 호칭을 원했다. 그래서 만들어 낸 새로운 지배자의 칭호가 황제(皇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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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시황제(始皇帝), 영정(嬴政).
황제(皇帝)는 중국의 신화시대의 통치자인 삼황(三皇) 오제(五帝)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의 문명은 신화시대의 복희(伏羲), 신농(神農), 여와(女媧)로 대표되는 3황 이후,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 등의 5명의 전설적인 제왕의 시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하(夏)나라로 시작되는 인간 왕의 시대이가 열린다. 참고로 삼황오제가 누구인지는 기록마다 하는 말이 다르다. 오제 중 당요와 우순은 둘을 합쳐서 전설적 태평성대인 요순(堯舜) 시대라고도 부른다.
처음에 영정의 신하들은 신화 시대의 삼황과 동격이란 의미에서 진황(秦皇)이란 칭호를 제안했다. 하지만 어쩐 이유에서인지 영정 스스로 황(皇)자에 낮은 격의 제(帝)를 붙였다고 한다. 이로써 신화적 개념인 황(皇)에 제(帝)가 붙어서, 오제(五帝)보다 높은 존재라는 뜻의 황제(皇帝) 칭호가 탄생했다. 영정은 최초의 황제로서 시황제(始皇帝)라고 불렸다. 왕(王)은 이후 작위 체계에 편입되어서 격하됐고, 중원의 지배자는 황제라는 칭호를 쓰게 됐다.
동양의 황제란 결국, 모든 왕과 제후를 평정하고 오제보다도 위에 있는 신화적으로 대단한 지배자란 뜻이다. 여기에 재미있는 개념이 붙게 되는데, 천하의 지배자로서 (그게 실현 가능했는지 여부와 별개로) 지상에 황제는 한 명 밖에 없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중국은 주변의 약소국들의 왕이 황제 칭호를 쓰지 못하도록 했고, 중국에 억눌린 주변국들은 황제 칭호를 쓰고 싶어 하게 됐다.
2. 로마의 황제(princeps, imperator, Caesar, Augustus)
왜 갑자기 고대 로마 이야기를 하는 걸까? 유럽의 황제는 로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유럽 역사의 황제는 중국의 황제보다 사정이 조금 더 복잡한데, 결론적으로 로마 제국에서 시작해서 로마 제국으로 끝난다. 중세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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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의 시작.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2-1) 로마 제국에서 유럽 최초의 황제가 등장하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건국되어 왕국 시대를 거쳐 기원전 509년 공화국이 된다. 공화정 로마는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수백 년에 걸쳐 영토를 확장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후 거대한 영토의 관리 문제, 전쟁의 후유증, 정치적 부패, 반란, 내전 등으로 혼란에 휩싸인다.
이 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등장한다. 카이사르의 영어식 발음이 바로 시저다. 카이사르는 민심을 등에 엎고 로마를 평정한 후 당시 최고 권력자 집단이었던 원로원을 굴복시킨다. 각종 개혁과 권력 집중 작업을 통해 1인 지배 체제의 기틀을 다졌지만, 본인은 황제가 되지 못하고 암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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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암살될 당시의 로마 공화국의 영토.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후계자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BC 63~AD 14)는 반대파를 추방하고 로마의 내란을 평정했다. 기원전 27년 원로원으로부터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 칭호를 받고서, 실질적인 로마 1대 황제가 된다. 이 시점부터 공화정 로마는 끝나고 황제가 지배하는 로마, 즉 로마 제국이 시작된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로마 공화국은 이미 넓은 영토를 지배했지만 제국이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이다.(제국이란 용어 자체도 없었다.)
(2-2) 로마의 황제
로마 제국 초기의 황제는 공식적으로는 황제가 아니었다. 공화국이 제국으로 바뀌고, 대놓고 일인지배 체제를 갖추면 반감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황제였지만, 대외적으로는 한 명이 여러 개의 권한을 전부 들고 있을 뿐 황제라는 자리는 없었다. (오늘날에는 그냥 황제라고 부른다.)
1대 황제가 된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여러 개의 칭호를 갖게 됐는데, 이 칭호들은 후에 유럽의 황제를 부르는 말들로 바뀐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중세 유럽에서 사용한 황제라는 말은 사실 고대 로마 황제의 직책을 그대로 부르는 것에 가깝다.
[ 로마 황제의 칭호들 ]프린켑스
(princeps) | 원로원의 1인자. 중세의 프린스(Prince) 작위의 기원. | 임페라토르
(imperator) | 군 통수권자. 중세에 프랑스어를 거쳐서 엠퍼러(Emperor)라는 단어로 변모함.
임페리움(imperium)은 본래 권한 자체를 뜻하는 단어였지만, 후에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이란 말이 되고, 중세의 엠파이어(empire)의 어원이 됨. | 카이사르
(Caesar) | 로마 공화정을 끝낸 자. 나중엔 로마 제국에서 부황제라는 뜻으로 쓰이게 됨. 중세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부르는 말인 카이저(Kaiser)와, 러시아 황제의 칭호 차르(Tsar/Czar)의 어원이 됨. | 아우구스투스
(Augustus) | 존엄한 자. 1대 황제 이후 로마 제국에서 황제의 칭호가 되며,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의 칭호를 둘 다 가져야 했다. |
칭호만 봐도 여러 개로 나뉜 권한이 하나로 모이는 걸 볼 수 있다. 이런 초기 로마 제국의 체제를 프린켑스(princeps, 원수)가 다스린다고 해서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라고 부른다. 훗날 황제가 공식적인 자리가 된 후로는 도미나투스(Dominatus, 전제정)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다시 보면 동양의 황제(皇帝)는 '왕보다 대단한 지배자'라는 뜻으로 만든 칭호이지만, 로마의 황제(princeps, imperator, Caesar, Augustus)는 기존의 권한과 높은 직책의 이름, 혹은 황제가 된 사람을 기리는 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로마 황제는 중국과 달리 왕이 황제가 된 것도 아니고, 땅을 넓히거나 주변의 왕국을 평정하고 나서 황제를 칭하고 제국이 된 것도 아니었다. 로마가 임페리움(Imperium)이라고 불린 건 황제(임페라토르)가 통치하게 된 이후이다. 로마 공화국은 이미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지만 제국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를 제국이라 부름은 '(공화정이 아닌) 황제가 통치하게 되었다'라는 뜻이라 볼 수 있다. 라틴어 칭호인 황제(imperator)는 한자어 칭호인 황제(皇帝)와는 다른 뜻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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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년 동서로 분열된 로마. 동로마는 흔히 비잔티움 제국이라고도 부른다.
약 80년 후에 서로마가 멸망하며 중세가 열린다.
이후 로마제국은 약 500년 간 지속된다. 서서히 쇠퇴해 가며 395년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열되었고, 476년 서로마가 멸망하며 중세가 시작된다. 우리가 로마 제국의 멸망이라고 말하는 건 보통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이야기한다. 동로마는 살아남은 로마로서 정통성을 유지하다가 1453년에 멸망하며 중세의 끝을 알린다. 중세의 시작과 끝을 모두 두 로마의 멸망을 기점으로 나누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가 오늘날에도 사용하는 달력의 7월과 8월의 이름은 로마 황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율리우스(Julius)가 줄라이(July)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어거스트(August)가 됐다. 다른 달의 이름을 신의 이름에서 따온 걸 생각하면, 유럽에서 로마 황제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2부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