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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 술 이야기 18 ▶ 아와모리(泡盛) : 오키나와의 소주
 

오키나와의 전통주인 아와모리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술입니다. 그래서 소개를 하지만 사실 다른 분들께 소개를 드릴 정도로 다양하게 마셔본 술은 아니기도 합니다. 그래도 대략 60종류 전후로는 마셔본 것 같기는 합니다만, 대부분은 몇몇 양조장의 제품군을 몰아서 마셔본 것이기 때문에 아주 폭넓게 마셔보진 못했습니다. 아와모리에 입문한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제가 쓰러졌거든요. 하지만 아쉬운 대로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1. 류큐 왕국과 아와모리

오키나와(沖縄)는 일본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섬으로 대만의 옆에 있다. 15세기 무렵 통일 왕국인 류큐(琉球)가 건국되었는데, 약소국으로서 중국에 조공을 해야 했지만,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연결하는 무역로에 위치해 있었다.

1609년 일본의 사쓰마(薩摩) 번(藩)의 침략을 받은 후 내정 간섭을 받게 됐지만 명맥은 유지되었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청나라의 영향력이 상실되자, 1879년 일본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었다. 사실 좀 민감한 얘기인데,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현 간의 감정의 골은 지금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google.com/maps/


아와모리(泡盛)는 류큐(琉球) 왕국 시절에 등장한 오키나와의 전통 증류주이다. 중국의 증류 기술은 한자 문화권 전체로 확산되었는데, 14~15세기 무렵 태국을 통해서 오키나와로 증류주가 전해졌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설이다. 오키나와 지역은 벼농사에 적합하지 못했기에 오래 전부터 주로 태국에서 수입한 쌀로 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류큐의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양조장이 건설되어 발전했으며, 15세기 말에는 아와모리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아와모리 제조 기술은 16세기 경 일본으로도 전해져서 일본 소주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아와모리(泡盛)라는 이름은 증류한 술 방울이 떨어져내릴 때 거품(泡, 아와)이 솟아오르는(盛り上がる)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명하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설들이 있으며, 정확한 유래는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류큐(琉球)라는 단어는 지리적 표시를 뜻하는 단어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오키나와에서 생산된 아와모리만이 류큐 아와모리(琉球泡盛)라는 명칭을 표시할 수 있다.




🍸 2. 아와모리의 맛과 특징

아와모리는 쌀(주로 태국쌀)로 만든 소주이다. 도수는 낮게는 20도대부터 높게는 60도대 이상까지 넓게 분포한다. 일본 소주와 전혀 다르게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맛과 향을 갖고 있다. 중국의 바이주가 진하고 화려하다면, 아와모리는 깔끔하고 화려하다. 서로의 맛과 향은 방향성이 다른데, 아와모리는 흑국(黑麴)이라는 특유의 누룩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적도와 가까운 덥고 습한 지역으로 음식이 쉽게 부패한다. 이 때문에 아와모리는 흑국이라는 누룩과 젠코지시코미(全麹仕込み)라는 두 가지 기술적 특징을 가진다. 흑국은 당화력이 높고 풍미가 뛰어나며 산을 많이 생성하기에 빠른 발효와 세균 번식 억제 능력이 뛰어나다. 젠코지시코미(全麹仕込み)라는 방법은 재료로 쓰이는 쌀 전체를 한 번에 누룩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아와모리는 누룩을 만들어서 쌀과 섞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쌀 전체를 누룩으로 만들고서 그대로 발효시킨 후 단식 증류한다. 이 방식은 세균 번식을 막아주고 풍미를 진하게 만들어준다.


아와모리는 한국 소주와 마찬가지로 쌀로 만든 소주이지만, 맛이 (비슷한 점도 있으나) 상당히 다르다. 아와모리의 향은 화려하며 맛은 진하지만 깔끔하고 곡물의 맛과 함께 단맛이 감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증류주 순위를 꼽자면 (1위) 바이주 (2위) 코냑 (3위) 아와모리 가 될 것 같다.

아와모리는 가성비도 정말 좋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꼭 드셔 보시면 좋겠다. 단점은 오키나와가 아니면 구하기가 힘들다. 참고로 필자는 한국에서 가격이 9배가 되어 판매되는 아와모리(정식 수입)도 본 적이 있으니, 국내에서 발견하실 경우 일본에서 얼마인지 꼭 찾아보시는 걸 추천한다. 일반적인 제품 라인은 원래 그리 비싸지 않다.




🍸 3. 쿠스(古酒)와 하나사키(花酒)

옛 고(古)자에 술 주(酒)자를 써서 쿠스(古酒, クース)라는 말이 붙은 아와모리가 있다. 쿠스는 3년 이상을 숙성시킨 아와모리를 말한다. 나무가 아닌 옹기에서 숙성하며, 블렌딩한 원액 중 가장 어린 원액의 숙성년수를 표기하도록 되어 있다. 숙성할 때 증발량에 따라서 주기적으로 술을 추가해주는 특이한 방법을 사용한다. 자주는 아니고 최종적으로 2~4회 정도 추가되는 것 같다.

고주는 숙성된 만큼 맛과 향이 안정되고 풍부한 경우가 많다. 날카로운 맛이 사라지고 묵직한 숙성의 맛이 생겨난다. 일반적으로 향도 더 풍부해진다고 말해진다.



즈이센(瑞泉)의 오모로(おもろ) 10년 고주.
오모로는 대표적으로 필자가 추천하는 아와모리이다.
특히 21년 숙성품은 정말 맛있다.


꽃 화(花)자와 술 주(酒)자를 써서, 하나사키(花酒)라고 읽는 아와모리도 있다. 요나구니(与那国)섬에서 예외적으로 제조가 허용되는 술로, 60도가 넘는 초고도수 아와모리를 하나사키라고 부른다. 보통 약 18도 짜리 원주를 1회 증류해서 만든다고 한다. 당연히 맛도 진하고 맛있다. 참고로 술을 '사키'라고 읽는 것은 오키나와의 방언이다.



이리나미히라(入波平酒造)주조의 마이후나(舞富名) 하나사키 65도.
필자가 쓰러져서 아직 마셔보진 못했다.





🍸 4. 아와모리를 마시는 법

아와모리의 도수는 20도대부터 45도까지 다양한데, 보통 본토에서는 낮은 도수가 더 잘 팔리고, 오키나와에서는 본토보다 높은 도수가 주로 팔린다고 한다. 오늘날의 일본인은 전반적으로 높은 도수의 술을 싫어하고 술을 희석해서 마시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아와모리 역시 현재에는 다양한 음용법이 존재한다. 찬물을 섞기도 하고 따뜻한 물을 섞기도 하고, 차나 커피, 우유를 섞어서 마시는 경우도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얼음과 함께 마시는 온더락스 스타일인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바이주처럼 그대로,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게 가장 풍미를 잘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왜 섞어서 마시는지 마셔 봐도 공감이 안 간다... 아와모리가 아니라 칵테일 개념이라면 차, 커피, 우유는 이해는 하겠는데... 뭐 어디까지나 취향 문제이긴 하다.



전통적인 아와모리를 마시는 술잔인 치부과(ちぶぐゎー).
(크기 비교를 위해 출연한 옛 휴대폰)


오키나와의 술잔이라고 하면 흔히 알록달록하고 거품이 들어 있는 류큐 가라스를 떠올리시겠지만, 원래 전통적으로 아와모리를 마시는 술잔은 도자기로 만든 치부과(ちぶぐゎー)라는 잔이다. 바이주 잔처럼 아주 작은 게 특징으로 필자의 취향을 저격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보통 도자기로 만든 작은 술 주전자인 카라카라(カラカラ)와 세트로 많이 이야기한다.




🍸 5. 아와모리를 사려면...

사실 아와모리는 구하기가 애매한 술이다. 우리나라는 주세법 때문에 직구를 하더라도 수입 증류주에는 세금이 엄청나게 붙는다. 그래서 사려면 오키나와에 가는 게 가장 좋다. 오키나와가 아닌 일본 본토의 경우 아와모리를 다양하게 파는 곳을 찾는 건 상당히 힘들다. 개인적으론 오키나와까지 갈 만한 가치가 있는 술이라고 보지만 모두가 동의하진 않을 듯하다. 참고로 아와모리를 사기 위해 오키나와로 향하는 분들을 실제로 종종 볼 수 있다.



즈이센 주조에 직접 방문해서 사온 한정판 53도와 장출고주(蔵出古酒).
정말 맛있으니 강력하게 추천한다.


아와모리는 일본 본토에서도 파는 것을 많이 볼 수 있고, 오키나와에 가서도 국제 거리와 같은 관광지에서 판매점을 여럿 볼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오키나와까지 갔다면 양조장을 직접 찾아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즈이센(瑞泉) 주조는 한 번쯤 찾아갈 만 하다. 방문객을 위한 견학도 가능하고, 시음도 여럿 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즈이센의 아와모리는 전반적으로 맛있다. 그 옆의 사키모토(咲本) 주조는 찾아갈 수는 있는데 즈이센처럼 방문객 대응이 제대로 시스템화되진 않은 것 같다. 사키모토의 술도 맛있다.



사키모토의 술도 맛있긴 한데, 다른 곳에서 살 수 있다면 굳이 방문할 필요는 없다는 느낌.


일반 주류샵에서 살 경우, 잔파(残波)도 좋은 선택지이다. 잔파는 가장 많이 팔리는 종류의 아와모리이기도 하고 맛도 굉장히 좋은 편이다. 필자는 도쿄에서 아와모리를 마시고 실망했었는데, 후에 아와모리의 매력을 일깨워 줬던 브랜드가 잔파였다.



아와모리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은 이후, 박람회에서 잔파를 마시고 다시 관심이 생겼다.
나이가 지긋하신 직원분과 대화를 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오키나와 특유의 감성이 있었다.


아마도 필자가 화려하고 진한 맛을 좋아하는 취향 때문인 것 같은데, 일본 본토에서 주로 파는 것들이나 주류샵에서 자주 보이는 아와모리는 대부분 실망스러웠다. 굉장히 유명하고 많이 팔리는 브랜드인 쿠메센(久米仙)이나 키쿠노츠유(菊之露)의 경우에는 뭘 마셔도 개인적으로는 입에 맞지 않았다. 아마 필자처럼 화려하고 농밀한 맛을 좋아하는 분이나 단맛이 있거나 맛이 풍부한 술을 좋아하시는 분은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다.


※ 참고로 글을 쓰면서 보니까 기존의 쿠메센이나 잔파 이외에도 즈이센이나 도난과 같은 브랜드가 최근에 정식 수입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단지 한국 주세가 엄청 비싸니 가격은 한 번 잘 보자. 오키나와에 직접 가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하다고 여기신다면 하나의 선택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필자도 현재의 국내 판매 상황은 정확히 모르겠다.




🍸 6. 아와모리의 고난의 역사

근현대의 역사를 보면 아와모리는 한국 소주와 다소 비슷한 고난을 겪었다. 2차 대전 때 오키나와는 미군과의 주 격전지가 되면서 일본 본토의 군대가 슈리성(류큐의 왕성)과 같은 주요 시설을 점거했다. 원래 슈리성에는 류큐 시절부터 보관되어 있던 오래된 아와모리가 많이 남아 있었는데, 시설을 점거한 일본제국군의 소비와 오키나와에 대한 폭격으로 인해서 보존되어 있던 거의 모든 아와모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자 오키나와의 거의 모든 양조 시설은 파괴된 상태였고, 종전 후의 식량난으로 아와모리 제조가 불가능했다. 또한 종전 후 아와모리를 처음 만들려고 할 때는 양조의 핵심인 흑국균이 유실되었다. 하지만 많은 양조 관계자와 대학 교수들의 노력으로 폐허속에서 흑국균을 찾아내고 복원하여 다시 아와모리를 만들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전후 초기에 양조가 금지되었을 때는 몰래 숨어서 밀주를 빚었다. 그 후엔 미군 부대에서 나온 조악한 재료로 술을 만들어 미군이 버린 맥주병에 아와모리를 담았던 역사도 있었다. 그 전통이 이어져서 지금도 갈색 병에 아와모리를 병입하는 경우도 있다. 1970년대에 오키나와 밖에서 소주 기술이 들어오기도 하고, 1980년대에는 법적으로 아와모리라는 표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맥이 끊길 수도 있었던 아와모리가 다시 만들어지게 되었다.



오키나와 특산품인 류큐 가라스의 알록달록하고 거품이 들어 있는 특징은
전후에 미군이 버린 콜라병 등을 재활용했던 것에서 기원했다.
이걸 보면 부대찌개가 떠오르며 묘한 감정이 든다.


사실 오키나와에 직접 가 보면 특히 고연령층의 주민들이 일본 본토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다양한 방면에서 (본토에게) 차별 당하는 감정이 표출되는데, 아와모리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도 그런 부분이 드러났었다. 수백 년 된 고주가 일본군에 의해 다 사라졌다는 이야기라거나, 지금 이야기할 아와모리의 도수에 대한 것도 그렇다. 아와모리는 원래 더 높은 도수도 있었는데 일본 본토의 법 때문에 45도를 넘으면 아와모리라고 부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 흥미로운 게, 필자가 말이 통하는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현지인분들이 본토에 대한 분노를 은근히 자주 터트렸다.

필자가 잘은 모르지만, 아와모리는 오랫동안 세금 감면 혜택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일본 주세법이 아와모리를 탄압했다는 말이 맞는지는 애매한 것 같다. 단지 오키나와가 역사적으로 본토에 의해 차별을 많이 당한 것은 맞기 때문에 쌓인 것들이 종합적으로 드러난 게 아닌가 싶다. 필자가 일본에 있을 때는 오키나와 주민의 미군 기지 관련 반대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지기도 했다.

참고로 2020년 3월을 기점으로 46도 이상의 오키나와 소주도 아와모리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 오키나와에 갈 때가 기대된다.




🍸 7. 마치며...

어째 술 외의 다른 이야기도 많이 한 것 같지만, 오키나와에 가서 현지민들이랑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저런 인상을 굉장히 자주 받게 되어서 그냥 같이 적어보았다.

오키나와는 아와모리가 아니라도 매우 좋은 곳이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다녀오시는 걸 추천한다. 말이 통할 경우 일본 본토와는 꽤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다. 노년층부터 젊은층까지 외지인을 살갑게 맞으면서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데, 마치 인심 좋은 마을에 가서 사람들과 조곤조곤 대화하면서 포근함을 느끼는 그런 이야기랑 비슷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일본 본토도 도시에 따라서 분위기가 많이 다르긴 하지만 오키나와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튼 아와모리는 매우 매력적인 술이고, 다시 가서 잔뜩 사올 날을 기대 중이다. 45도 제한이 풀렸으면 더 높은 술도 나왔을까? 빨리 가서 사오고 싶다! 생각해 보니 술을 못 마시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오고 싶다!


여기까지 해서 동양의 소주 시리즈는 일단 끝을 내겠다. 일본 소주도 이론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타인에게 설명할 만큼의 경험을 쌓진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젠가 훗날을 기약하겠다.


2022-06-22 00:00:00 | [Comment(0)]




2022년의 절반을 보내며...
 

올해 1월부터 주 2회 연재를 시작해서 시간이 반 년 정도 지났습니다. 지금 수준의 글을 주 2회 연재하는 건 생각보다 벅차군요. 중간 중간에 쉬어가는 글을 쓰더라도요...

최근 3종 종교 연재 6편을 썼는데요. 종교 얘기를 꺼낸 건 원래 다음 연재 예정이었던 교회나 기사 관련된 글을 쓰기 전의 기초 쌓기의 일환이었습니다. 과거 사회는 종교가 중요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한 번은 얘기해야 했죠. 기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무술이나 무기 얘기가 나올 텐데 그 전에 무협 카테고리도 만들었어야 했고요. 마법 얘기를 하게 될 경우 무협의 내공이나 과학에 대해서도 얘기해 둬야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시작한 기초 쌓기 연재에만도 몇 달이 걸렸네요. 판타지 첫 번째 연재였던 오등작의 경우, 배경지식을 미리 써뒀으면 좋았을 텐데 없어서 허둥지둥했었거든요. 그런 상황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작년 말 즈음의 원래 계획은 지금 6월쯤부터 창작물 연재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연초에 시작하길 잘 한 것 같아요. 만약에 6월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12월 쯤 돼야 지금 정도로 진행이 됐을 테니까요. 알고 있던 것이라도 제대로 정리해서 글로 쓴다는 게 만만히 볼 게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다시 한 번 재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하고요.

아무튼 6개월쯤 달렸더니 살짝 지쳐서 창작물 연재는 잠시만 쉬다가 7월 중에 다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글을 쓰는 빈도는 아직은 주 2회를 유지할 예정입니다. 다음 주는 6월의 술 연재가 올라갈 것이고, 그 다음주는 음악 CD에 관련된 글이 올라갈 예정입니다.

창작물 연재는 어떤 순서로 올릴지 고민 중입니다. 기초 쌓기를 하던 김에 마법과 내공 얘기를 좀 더 해 보고 싶기도 한데... 너무 오래 중세 얘기를 안 했으니 원래 예정이었던 교회와 기사 얘기를 올릴까도 싶고요. 근데 기사 얘기로 넘어간 후에 다시 마법 얘기로 돌아오는 것도 타이밍이 흠... 좀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아직 움직일 수 있을 때 글로 남기자는 이 계획은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것 같습니다. 이걸 위해서 그렇게 시간과 열정을 투자했던 건 아니었단 생각도 가끔 듭니다만, 혼자 알고 있어 봐야 뭐하겠냐는 생각도 들고요. 어찌 보면 제 취향이 듬뿍 담긴 긴 글일 뿐인데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2-06-18 00:01:00 | [Comment(2)]




부록 : 도교의 역사
 

도교 연재에서 자세히 이야기하지 못한 도교의 역사입니다. 관심 있을 분들을 위해서 대략적인 흐름을 남깁니다.


1. 종교로서 체계화 되기 이전의 모습

도교는 고대부터 중국이 가지고 있던 다양한 요소가 합쳐진 종교이다. 종교 조직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도교의 재료로 쓰일 요소들은 발생해 있었다.

역사에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건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세기~기원전 3세기)인데, 제자백가의 하나였던 신선가(神仙家)와 음양오행 사상이 오늘날 방선도(方仙道)라고 불리는 신선이 되고자 하는 수행자들을 낳았다.

이들은 방사(方士)라고 불렸으며, 일찍부터 권력자의 옆에서 각종 방술을 행하고 불로장생의 약을 찾아서 중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진시황 때의 서복(徐福)이나 삼국지에 등장하는 우길(于吉)이나 좌자(左慈) 같은 자들이 방사였다.

한(漢)나라 때에는 중국인의 시조라 여기는 황제(黄帝)와 도가의 대표자인 노자(老子)의 숭배가 합쳐지며 황로(黄老) 학파가 성행했다. 자연스럽게 방사들도 황로 사상에 감화됐다. 황제와 노자에 대한 숭배는 후대의 도교에서도 굉장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2. 조직화된 교단의 첫 등장 : 태평도와 오두미도

방사들이 활동할 때는 뚜렷한 종교 조직이 없었다. 신선이 되려는 가르침도 비밀리에 전수되거나 일인전승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태평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도교라는 구체적인 종교는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2세기 후한 말, 혜성처럼 두 교단이 등장했다. 바로 장각(張角)의 태평도(太平道)와 장도릉(張道陵)의 오두미도(五斗米道)이다.

역사에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아, 태평도는 천하의 도(道)가 어지러워졌으니 자연스러움과 공평함을 바로 잡아 태평을 회복해야 한다는 기치 하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삼국지에 나오는 황건의 난이다. 황색 두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태평도의 주신이었던 중황태일(中黃太一)의 이름에서 황(黃, 노랗다)을 따왔다고도 말해진다.

황건의 난은 내부의 배신으로 삐걱이다가 결국 진압되었고 태평도도 와해됐다. 이 사건으로 도교는 첫 등장부터 권력자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도교는 중국의 민간 신앙 그 자체였고, 백성뿐 아니라 지도자들도 대부분 도교에 감화될 수 밖에 없었다. 권력자들은 도교를 가까이 하고 도사들과 친하게 지냈다. 예컨대 삼국지의 조조, 유비, 손책도 도사를 존경하고 친하게 지낸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비슷한 시기에 장도릉이란 자가 오두미도(五斗米道)라는 교단을 창시했다. 교주를 천사(天師)라고 불렀는데, 훗날 천사도(天師道)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진다. 정교합일의 방침 하에 파촉지역에서 거대한 종교 왕국을 건설했지만, 3대 천사였던 장로가 결국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장로를 진남장군에 봉했다고 한다.

천사도는 살아남은 첫 번째 도교 교단이 되어 이후로도 성세를 이뤘다. 명문세가의 자제들에게 신앙의 뿌리를 내리며 깊은 입지를 다졌으며, 민간에도 의료 행위를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천사도는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아 있다.

천사도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성씨로 교주의 명맥을 잇는다는 것이다. 계승 장문인은 반드시 장씨여야 하며, 장씨가 아닐 경우 성을 바꿔야 한다. 또한 육식, 결혼, 출산 모두 가능하며,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수행하는 것을 격려했다. 오늘날 도교 도사가 결혼하지 못한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도교는 본래 음과 양의 조화와 도의 자연스러움을 중시했기에 결혼을 금지하지 않았다.



3. 도교 교단의 정립 : 5세기

천사도의 등장 이후 도교는 종교로서의 교리와 단체로서의 체계를 꾸준히 정비해나갔다. 비밀리에 수행하던 도사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여러 종파가 탄생했다. 이 과정에서 처음 이야기했던 중국의 신화, 민간신앙, 철학, 원시종교 등을 모조리 흡수하고 비교적 일관성있는 종교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그 시기가 대략 5세기 무렵이다.

4세기 초 천사도를 기반으로 한 상청파(上淸派)라는 종파가 파생됐다. 신선 계보가 정비되어, 본래 태상노군(노자)을 숭배하던 신앙에, 원시천왕, 태상대도군, 태미천제군 등이 편입됐다. 천사도의 부주비술을 계승했고 명상법과 호흡법을 더욱 중시했다. 남조 시대에는 모산종(茅山宗)으로 발전하며, 기존 도교 교리를 집대성했다.  

상청파와 모산종은 무협지에도 종종 등장한다. 보통 모산파(茅山派)란 이름으로 부적이나 시체를 이용한 좌도방문에 치중한 분파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도교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초기 종파이다. 강남에선 영보파(靈寶派)가 등장하여 불교의 체계화된 시스템과 여러 사상을 흡수했다. 원시천존이 사후세계(지옥)까지도 구원을 해준다는 사상이 생기고, 불교의 인과응보와 삼세윤회 사상도 흡수했다.

북위에서는 구겸지(寇謙之, 365-448)의 북천사도가 등장하며 기존 천사교의 부패를 개혁하고 유교의 윤리관과 예법을 크게 적용했다. 구겸지는 태무제(太武帝)의 신봉을 얻고서 도교를 처음으로 국교(國敎)로 만들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도교의 위상이 크게 높아지고 불교를 금하기도 했다.

남쪽에서는 육수정(陸修靜, 406-477)이 도교 경전의 분류 및 정비를 진행했다. 육수정 역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렇게 4~5세기를 거치며 도교 교단과 교리가 정비되고 어느 정도 통일되며, 기존의 중국의 사상, 철학, 전설, 신화, 종교 등을 집대성했다. 특히 먼저 체계가 잡혀 있던 불교의 시스템을 많이 가져왔는데, 불교측의 기록에서는 5세기 이전 도교에는 천존상이 없었는데 불교를 따라서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참고로 도교 교단의 토대가 정립되었지만, 이후 설명하는 전국의 도교들이 모두 하나의 큰 집합체로서 통일된 뿌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중국이 일단 워낙 크고 종파가 다양하기 때문이며, 도교에서는 도사가 천지신명에게 계시를 직접 받고서 새로운 경전이나 교리를 썼다고 하는 식의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이질적인 종파가 등장했어도,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말로 합리화된다. 물론 최소한의 인정은 받아야겠지만 말이다.




4. 도교 최대의 전성기 : 수나라와 당나라

수나라-당나라를 거치며 도교는 최대의 성세를 이룬다.

수나라 때에 중국에는 도참설(하늘의 계시와 예언에 대한 이야기)이 성행하는데, 권력자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예컨대 수문제 양견은 원래 박주 자사에 불과했을 때, 도교의 참요(讖謠, 예언과 관련된 민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예언을 따라 했다. 훗날 그가 황제가 되자 도교의 겁력(劫歷)을 따라서 개황(開皇)을 연호로 삼았다. 수나라는 이렇게 시작부터 도교와 함께 했다.

이후 관방의 지지를 얻으며 도교 조직이 완비되고 전파 범위도 광범위해졌다. 권력자들의 도교에 대한 경계심도 낮아지고, 도사들은 황제들과 가깝게 교류했다. 특히 종남산을 근거지로 한 도교 종파가 크게 성하여, 종남첩경(終南捷徑)이란 고사성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종남산을 가까이하면 출세할 수 있다는 뜻으로, 편법으로 출세함을 비꼬는 말이다. 무협지에 나오는 종남파(終南派)는 아마도 이 때의 성세를 기억하고 만들어진 가상의 도교 문파일 것이다. 수나라 시절 많은 도교 사원이 건립되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도교 조직 발전을 적극 지원했다.


당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도교와 가장 가까웠던 나라이다. 수나라 말에는 "노자가 세상을 구원하고 이씨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이 유행했다. 훗날 당나라를 세울 이연(李淵)은 이 예언을 교묘히 이용했다. 결정적으로 이연이 군대를 일으킬 때 누관파(樓觀派)의 도사 기휘(558-630)가 누관대의 군량과 마초를 내어 이연의 군대에 합류했다. 기휘는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 말했다.

이연은 황제가 된 후 노자를 당 왕조의 조상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종성궁(宗聖宮)을 세워 조묘(祖廟)로 삼았다. 참고로 노자의 본명은 이이(李耳)라고 전해진다. 당고조 이연은 친히 누관에 와서 노자에게 제사를 올렸다. 또한 공식적으로 도교의 위상을 재고하여 선노후석조의 순서, 즉 중국에선 노자와 공자의 가르침이 먼저 시작되었고, 석가(부처)의 가르침은 나중에 일어났으니 마땅히 손님의 예를 존중해야 한다면서, 노자가 첫째이고 공자가 그 다음이며 석가는 말석이라 말했다.

이후 노자의 도덕경을 민가에 비치시키고 과거 과목으로 넣었으며, 도교를 연구하는 기관인 숭현학(崇玄學)을 설치하여 도력(道曆)을 제정하기까지 했다. 당대(7-10세기)에 도교는 국가의 관리를 받으며 엄청난 규모의 성세를 이루었다.

한편 당나라 말에는 불로불사의 약을 연구하는 연단술(외단)의 부작용으로 인해 외단(外丹) 멀리하고 내단(內丹) 수련을 중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여기서 내단이라 함은 인체의 단전에 자연의 기를 모아서 구슬을 만드는 내공 수련을 이야기한다.



5. 송원 교체기 : 전진도, 화산파, 정일교

이후 송나라까지 꾸준한 성세를 이루었는데, 송원교체기에 이르러서는 백성들은 몽골의 침입에 대한 위안을 얻기 위해 더욱 도문(道門)에 들어섰다. 도교에 입문하려는 백성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12세기 후반 북방에서는 왕중양의 전진도(全眞道)가 일어났다. 사회 혼란기에 출현한 전진도는 무엇보다도 구제활동을 중시하여, 남을 배려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것을 수행의 기본으로 삼았다. 특히 구처기가 장문인이 된 후로 더욱 적극적이 됐는데, 그는 칭기즈 칸의 살육을 막기 위해 제자들과 북상하여 칸과 직접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전진도는 불교 선종의 영향을 많이 받은 종파이다. 교리에 출가를 통한 엄격한 수행과 많은 금기가 존재한다. 출가한 도사는 세상과 단절되어서 술과 고기를 금해야 하며, 결혼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진도는 강북 지역에서 널리 퍼져서 북종(北宗)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후에 북쪽 지역 도교는 결혼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에 비해서 강남 지역에서는 성세를 누린 (천사도의 후신인) 정일교(正一敎)가 남종(南宗)이라 불리었는데, 남쪽의 교파는 대체적으로 결혼에 관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진도에서 결혼을 완벽하게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고도 한다. 대표적으로 여동빈도 결혼을 했고, 전진칠자 중에도 결혼 후 출가한 부부가 있다. 전진도의 영향인지 실제로 송나라 이후에는 결혼 후 도문으로 출가하는 패턴이 흔해졌다고 한다. 또한 전진교는 계율을 굉장히 중시했으며, 반대로 정일교는 꽤 느슨한 편이었다고 한다.

왕중양에게는 일곱제자가 있었는데 마단양, 담처단, 구처기, 유처현, 왕처일, 학대통, 손불이로 훗날 북칠진(北七眞)이라 불리우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우선파, 남무파, 수산파, 용문파, 유산파, 화산파, 청정파의 7개 지파를 만들었다. 무협지에 단골로 나오는 화산파(華山派)는 이렇게 시작됐다.


강남에서는 천사도의 후신인 정일교가 성했다. 천사도는 본래 북방에서 퍼졌으나, 후에 근거지를 남쪽으로 옮겨서 강서성 용호산에 자리잡았다. 이렇게 정일천사도(正一天師道) 용호정이 탄생했다. 남쪽의 정일도와 영보파, 상청파는 부적을 이용한 법술 등을 중시하던 부록파에 속했다. 그런 와중에 전진도가 창립될 무렵 남방에서도 내단 수련을 특화한 유파가 탄생하니 금단파 남종(南宗)이라 말한다. 후에 금단파 남종과 북방 전진도의 교리가 융합되며 발전한다.

한편 13세기 말 등장한 정명도(淨明道)는 정명충효도(淨明忠孝道)라고도 했는데, 충효를 몸가짐의 입문 공부로 삼고 충효가 두드러지는 신선을 이상적 모델로 설정하며 비교적 뚜렷한 윤리도덕의 색채를 띠었다. 이런 여러 교파의 출현은 서로의 교류로 이어졌고, 도교 교리는 더욱 다양해지고 풍부해졌다.

원나라 이후 전진교와 정일교는 북과 남을 대표하는 도교 최대의 문파로서 이름을 떨쳤다.



6. 도교의 몰락과 명대 이후의 도교

원나라 태종 10년(1238)에 어전에서 도교와 불교 사이에 교리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에서 도교가 패배한 이후 서서히 퇴보의 길을 걸었다. 도교 경전이 불태워지기도 했는데, 원나라 세조 지원 18년(1281)에 《도덕경》을 제외한 7천 8백 권에 달하는 《현보도장》 대부분이 소각되었다. 《현보도장》은 도교 경전 8만 여권을 집대성한 대규모 도경이었다.

명나라가 세워지자 명태조(明太祖, 1368∼1398)는 도교를 국가 차원에서 엄격하게 통제했다. 도교를 통제하는 기관을 세우고, 도사들에게 국가 자격증을 발급했다. 천사도 도사의 최고 칭호였던 천사(天師)가 천자의 권위를 침범한다며 사용을 폐지하고, 진인(眞人)으로 고쳐 쓰게도 했다.

통제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명태조(1368-1398 재위)는 직접 《도덕경》을 주해했으며, 영종 정통 9년(1444)에는 조서를 내려 도장 교정을 감독하게 했다. 1445년 도경이 완간되어 《정통도장》이라 명명했고, 이후 《만력속도장(萬曆續道藏)》까지 판각되어 인쇄됐다. 둘을 합쳐 모두 512함, 5485권, 12만 1589쪽이었다. 교단 지도자들을 고위 관직에 임명하여 이용하기도 했다.

청나라 때도 도교는 명맥을 유지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후 도교는 탄압을 받고서 중국에서 세력을 거의 잃어 버렸다.


2022-06-18 00:00:00 | [Commen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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