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상자

reply by 아이어스 in 정상인

한산 소곡주가 맛이 괜찮지. 현재 상품화된 한국의 술 전체에서 보면 그렇게 대단히 맛있는 술은 아닌데, 구하기 쉽다는 게 우선 가장 큰 장점일 것 같아. 단지 한산 소곡주는 시중에서 구하는 건 살균 약주라서 풍미가 많이 떨어지고, 생주를 구해서 마셔보는 게 좋지. 살균 약주는 솔직히 굳이 다시 먹고 싶지 않지만, 생주는 확실히 괜찮아.

한라산은 희석식 소주라서 맛을 논할 가치가 없고... 네가 초록 병에 든 보통 소주를 평소에 즐긴다면 마셔봐. 난 식용 알코올에 물과 조미료를 섞은 것은 술이 아니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희석식 소주는 일제 시대에 도입된 이후 전통 소주를 사라지게 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딱히 전통주와 함께 논하고 싶지는 않다.

이강주는 도수에 따라 버전이 몇 가지 있는데, 25도 이강주가 원래 전주 이강주의 도수야. 시중에서는 그보다 낮은 도수를 더 자주 보는데 25도보다 낮은 건 맛이 없으니 먹지마. 개인적으로 소위 전통적인 소주 중에서는 이강주가 제일 취향에 맞는데, 배(이)와 생강(강)으로 풍미를 더했기 때문에 맛이 좋다. 단지 엄청 맛있는 편은 아님. 40도 이강주도 있긴 한데 아직 못 먹어봤네^^; 하지만 원래 도수는 25도. 30도로 증류된 후 배와 생강을 섞는 과정에서 도수가 조금 내려간다.

죽력고는 흠. 좀 취향이 갈리는 술인데. 숙성이 충분히 되었다면 마실만하다고 생각해. 근데 송명섭 명인님 이름을 듣고서 그냥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으니 주의하고. 기본적으로 대나무에서 나온 죽력의 쓰고 나무향이 나는 맛이 메인이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거야. 난 숙성이 잘 된 경우는 맛있다고 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별로인 것 같음. 보통 잘 모르는 사람이 그냥 먹어보면 싫어할 사람이 더 많을듯하다. :)

감홍로는 계피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달콤한 소주로, 다양하게 첨가된 약재들의 풍미가 상당히 매력적인 술이야. 개인적으론 용안육의 풍미가 좋아. 특히 서양인들이 마시고 크리스마스 같은 맛이라고 좋아한다더군. 흔히 조선 3대 명주라고 불리는 이강주/죽력고/감홍로 중에서 맛만으로는 술 안 좋아하는 사람도 가장 거부감 없이 마실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기엔 좀 독하지. 원래 우리나라 술 문화는 술을 취할 때까지 들이키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뭐 그렇게 마시는 사람한텐 위에서의 평처럼 나올 수도 있겠다.

진도 홍주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전통주란 이름을 달고 있는 술로 맛도 정말 별로라고 생각해. 10년 전만 해도 지초의 흙맛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마치 '건강주'라는 이미지로 홍보를 하면서 시작했었지. 요즘은 각종 당과 조미료를 잔뜩 첨가해서 맛을 좀 좋게 만들기는 했던데... 내가 10년 전의 그걸 첨가하기 전의 맛을 알고 있고 싫어할 뿐만 아니라, 그걸 올리고당, 과당 등으로 가리려고 하는 것도 마음에 안든다. 무엇보다 그럼에도 그리 맛있는 술은 아님.

문배주는 수수와 조와 밀로 빚은 증류주인데, 한국 토종 배의 한 종류인 문배의 향이 난다고 해서 문배주야. 실제로 마셔보면 문배향이 난다. 현존하는 전통 증류주 중에서 첫 향만으로 보면 으뜸이지만, 최고급 스피릿류 특유의 잔향이나 여운이 부족한 것이 아쉽지. 하지만 현존하는 한국 소주 중 훌륭한 편이긴 해. 여러가지 도수가 있는데 40도가 안되는 술은 맛이 없으니 마시지 않는 게 좋아. 계속 도수 얘기를 하는 것은, 증류주는 도수가 높아지면서 맛과 향의 응축이 일어나고, 이걸 희석할 경우 잘 해야만 풍미가 유지되는데, 한국 전통 소주는 이걸 잘 희석하지 못한다. 고도주가 좋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희석 버전이 맛이 너무 없어. 아, 그리고 문배주와 보드카는 근본적으로 다른 맛의 술이라 이렇게 비교하는 건 서로에 대한 실례임.

안동 소주는 뭐 한국을 대표하는 소주 중 하나인데. 그냥 안동 소주라고만 하면 그 안에서 너무 종류가 다양하고... 크게 박재서 명인님의 명인 안동 소주와 조옥화 명인님의 민속주 안동 소주로 나뉘어. 둘 다 아주 좋은 술인데, 명인 안동 소주는 맛의 개량을 많이 해나가셔서, 감압식 증류를 통해 맛을 부드럽게 하고 뒤에 치고 올라오는 화근내도 잡으셨지. 묵직한 풍미에 적절한 쓴맛을 가졌기에 괜찮은 편이야. 반면에 민속주 안동 소주는 전통 방식의 단식 증류로 술을 내리시는데 처음에 치고 올라오는 쌉쌀하면서 상큼한 소주의 향이 매력적인 술이야. 내 생각에 전통주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안동 소주는 나중으로 미루는 게 좋고, 처음에는 명인을, 그 다음에 민속주를 마셔보는 걸 추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추천을 더하자면, 전통 방식의 한국 술들은 몇 가지를 제외하면 "술에 적응이 된 다음에" 마시는 것을 추천하는 편이야. 특히 요즘에 새로 만들어진 약주나 탁주의 완성도가 더 높다고 본다. 한국 술에 관심이 있다면 추천을 해줄테니 더 물어봐. 내 생각에 소수의 전문가를 제외하면 이제 나보다 한국 술에 대해서 더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물론 나도 계속 공부해가는 중이긴 하지만 말이지 :)

2016/04/29(Fri) 15:17:28

reply by 아이어스 in 정상인

술은 그냥 취미지^^; 좋아하면 조금씩 알게 되어가는 거니까:)

미국에서 괜찮은 한국 술을 구하는 건 불가능하니 술 맛을 알고 싶은 거면 미국에서도 마실 수 있는 술을 마셔보면 되지.

우선 자기가 관심이 있는 술이 있으면 그걸 마셔보는 게 좋아. 술은 종류별로 워낙 풍미나 취향이 달라서 누가 추천한다고 항상 맛있는 건 아니거든. 뭐 음식도 그렇지만. :)

쉽게 마실 수 있는 건 결국 펍이나 바에서 마실 수 있는 아이들 아닐까? 결국 맥주나 리큐르, 칵테일류가 제일 무난할 것 같은데... 일단 잘 모를 것 같은 리큐르(Liqueur - 미국에서는 리큐어라고 발음할지도?)나 칵테일 같은 걸 얘기하면...

일단 리큐르라는 건 쉽게 말하면 술에다가 여러가지 재료를 섞은 거야. 이건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술 종류인데, 원래는 수도원 등에서 약으로 쓰기 위해서 만들곤 했음. 지금은 그냥 칵테일의 재료 등으로 더 많이 쓰이지만.

아무튼 완제품으로 마실 수 있는 무난한 리큐르라면 역시, 힙노틱(HPNOTIQ)이지. 프랑스의 리큐르지만 미국에서도 파티주로 유명하다 하니 구하기 쉬울 걸? 기본은 달콤하고 열대 과일 주스의 풍미를 내는 술인데 향도 괜찮고 산미를 잘 잡아줘서 뒷맛이 깔끔해. 그렇다고 너무 주스 같지도 않고 굉장히 맛있는 술이야. 마시는 법은 스트레이트도 괜찮지만 온더락이 더 추천. 종류가 두 가지는 최소한 될텐데, 가장 기본인 파랑색을 추천해. 힙노틱은 마셔볼 가치가 있는 술임. 일단은 리큐르는 이거 하나.

칵테일은 종류가 워낙 많아서 취향이 엄청나게 갈리는데... 바에서 쉽게 마셔볼 수 있는 걸로 해보자. 가장 쉬운 건 역시 진토닉. 진에다가 토닉워터를 섞고서 얼음 넣고 라임 등을 살짝 첨가한 건데. 진 자체가 워낙 종류가 많아서. 내가 추천하는 것은 탱커레이 넘버텐(Tanqueray No. 10)이야. 수년 전까지 꽤 오랫동안 최고의 진으로 찬사를 받던 아이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진이지. 참고로 진토닉은 그냥 얼음+진+토닉워터 만으로도 맛이 나기때문에 집에서 사다가 만들어 먹어도 괜찮아. 진토닉에 쓰는 종류인 '런던 드라이진'에 속하는 애들은 기본적으로 단맛이 없고, 솔잎향과 비슷한 식물성의 복잡한 향이 특징이야. 당연하지만 진도 맛없는 진은 맛 없으니 아무거나 마시고 맛없다고 생각하지는 마^^;

혹 진이 마음에 안 들 경우 마가리타(Margarita)도 추천해. 쉽게 말하면 라임주스와 데낄라를 섞고서 소금을 함께 먹는 술이지. 난 파랑빛이 나는 술이 좋아서 블루 마가리타를 선호해. 달콤하면서도 데낄라가 주는 용설란의 풍미에 잔에 묻은 소금이 짠맛을 더해주는 좋은 술이야.

사실 셋 다 완전히 내 취향 술이긴 한데^^;
취향대로 다 말하면 끝도 없으니, 만약에 술이 궁금하다면 쟤네를 한 번 마셔봐. 그리고서 맛이 없다 있다 왜 맛없다 뭐 그런 게 나오면 자신의 취향을 좀 더 알 수도 있겠지. :)

그리고 저게 아니라도 맥주가 궁금하면, 맥주도 종류가 있으니 종류별로 유명한 걸 한번 마셔봐. 크게 페일 에일, IPA, 흑맥주, 라거... 뭐 대충 크게 이런 식으로 나누는데 나도 이건 이제 공부하기 시작했고... 저렇게 종류별로 나눈 것 중에서 유명한 애를 몇 개 마셔보면 자기 취향에 맞는 아이가 뭔지 알 수 있어.

참고로 최근 트라피스트(Trappist)라는 인증을 받은 맥주들을 몇 개 마셔봤는데 전부 맛있었으니 참고해. 트라피스트 인증은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빚은 맥주를 말하는 것 같아. 벨기에 맥주가 맛있는듯. :)

하나 더 덤으로 말하면 난 미국 맥주 중에선 사뮤엘 아담스(Samuel Adams)를 좋아해. 즐겨 마실 정도는 아니지만 ㅎㅎ

2016/04/29(Fri) 18:1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