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를 영어로 표기할 때 보통 ㄱ은 g, ㅋ은 k로 표기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어렸을 때부터 g는 ㄱ이고 k는 ㅋ이라고 배우죠.
하지만 사실 모든 언어는 서로 발음이 매우 다르고, 우리는 보통 모음의 다름에 집중하지만 자음 역시 매우 다릅니다. 왜 우리는 '김'을 영어로 'Kim'이라고 쓰고, (지금은 바뀌었지만) '부산'을 'Pusan'이라고 쓸까요? 그렇게 쓰는 게 외국인 입장에선 똑같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 이 글은 일본어 때문에 꺼낸 이야기이지만, 영어에서도 같은 개념이 성립하기 때문에 둘 다 이야기하겠습니다.
1. 어딘가 어색한 외국인의 발음
요즘은 외국인이 한국어를 하는 모습을 TV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오래 한국에 살아서 상당히 유창하게 말을 잘 하는 사람도 많지만, 솔직히 정말 한국인처럼 자연스러운 발음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필자가 본 경우에서만 따지면 다섯 손가락을 채우지도 못한다.
이유는 모든 언어의 자음과 모음은 발음하는 방식이 대부분 다르고, 그 다름은 턱과 이빨과 혀와 성대가 배치된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모니카와 트럼펫의 소리는 원리는 같지만 결과가 다르다. 소리를 만들어내는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결과물도 달라진다.
인간은 갓 태어난 아기일 때는 짐승 소리를 낸다. 울든 웃든 상관없이 언어가 아닌 '소리'를 뱉는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말을 배우고 조음(調音)을 하는 방법이 각자의 언어 문화권에 맞춰서 고정되어 가는데, 말 뿐만 아니라 소리를 듣는 귀와 뇌 역시 자기 언어에 맞춰진다. 그 결과 성인이 되면 '자기 언어'를 기준으로 외국어를 발음하고 듣게 된다.
한국어는 예사소리인 ㄱ과 거센소리인 ㅋ, 된소리인 ㄲ을 구분하는 언어다. 여기서 ㄱ과 ㅋ은 소리의 강도, 한국인 입장에선 소리가 파열하는 강도를 기준으로 구분하고, 된소리인 ㄲ은 이론적으론 기식(氣息)을 뱉지 않는 무기음에 해당한다.
하지만 영어 등의 서양의 언어나 일본어의 경우, 이런 식으로 소리를 발음하지도 구분하지도 않는다. 예사소리/거센소리/된소리의 구분은 서양인이나 일본인에게는 구분의 의미가 없는 같은 소리의 범위에 속하는 발음이다. 그들의 귀에는 똑같이 들린다.
외국인이 말하는 한국어는 거센소리, 된소리, 예사소리를 구분이 안 되게 비슷하고 애매하게 발음할 때가 90% 이상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어에는 그런 발음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들어서 구분하지 못하니 말할 때도 구분하지 못한다. 발음을 하는 사람 스스로가 차이점을 알지 못한 채 흉내낸다.
이런 건 다 ㄱ/ㅋ과 g/k이 근본적으로 다른 발음이기 때문이다.
2. 성대의 울림 : 유성음(有聲音)과 무성음(無聲音)
성대(聲帶)는 목에 있는 조음 기관으로 소리를 만들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리를 낼 때 성대가 울리면서 나는 소리를 유성음(有聲音)이라고 하고, 성대가 울리지 않으면서 나는 소리를 무성음(無聲音)이라고 한다.
이 구분은 한국어를 발음할 때는 중요하지 않다. 원래 없던 구분법으로, 서양에서 들어온 개념이다.
한국어와 달리 영어나 일본어의 g와 k의 구분은 성대가 울리냐 울리지 않느냐의 차이로 한다. g는 성대가 울리는 유성음이고, k는 성대가 울리지 않는 무성음이다. 일본어에선 が는 유성음이고 か는 무성음이다.
서양인이나 일본인은 발음의 구분을 성대가 떨리냐 떨리지 않느냐로 한다. 소리를 만들어 뱉을 때도 그렇게 하고, 소리를 들을 때도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분한다. 이 차이를 한국인은 귀로 들어서 구분하지 못한다.
이런 건 어렸을 때부터의 훈련 때문으로, 발음하는 방법이 몸에 완전히 익음으로서 어른이 되어서는 바꾸기 어렵다. 이런 차이가 존재하는지, 스스로 그런 차이를 구분해서 발음하고 듣는지 본인들도 모른다. 한국인이 자연스럽게 ㄱ/ㅋ/ㄲ를 구분하는 것처럼, 외국인은 자연스럽게 g/k를 구분한다.
한국어의 ㄱㅋㄲ를 유/무성음을 기준으로 구분하면 아래와 같다.
유성음
무성음
단어의 첫 글자가 아닌 ㄱ
단어의 첫 글자인 ㄱ
ㅋ
ㄲ
한국어는 단어의 첫 번째 글자를 유성음으로 발음하지 않게 되어 있다. 그렇게 훈련이 된 한국인은 첫 글자를 성대를 떨면서 발음하지 못한다.
그래서 '김'은 첫 글자 ㄱ이기 때문에 무성음이 되고, 외국인의 귀에는 Kim으로 들린다. 한국어 표준어 맞춤법의 외래어표기법은 이런 특징을 반영해서 만들어진 결과다.
일본어 표기
영어 표기(발음)
한국어 표기(맞춤법 외래표기법)
キム
Kim
김
豊臣
Toyotomi
도요토미
徳川
Tokugawa
도쿠가와
※ 원래 일본어를 설명하려다가 나온 이야기임을 참고해 주세요.
'도요토미'나 '도쿠가와'의 첫 글자는 엄연히 T 발음이지만, 한국어 외래어 표기법(일본어)은 이걸 'ㄷ'으로 표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한국인이 '도쿠가와'라고 발음하더라도, 일본인이나 서양인의 귀에는 'Tokugawa'로 들리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성대를 울리는 소리를 의도적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런 구분법은 한국어에 없었고, 그냥 말하다 보면 성대가 울리는 경우가 있고 아닌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기'는 재미있는 발음의 단어다. '고'의 ㄱ은 무성음이고, '기'의 ㄱ은 유성음이다. 아이들이 '고기'를 '꼬기'라고 발음할 수 있다. 여기서 첫 글자 ㄱ은 무성음인데, ㄲ도 무성음이다. 무성음 '고'는 '꼬'가 돼도 나름 자연스럽지만(?), 유성음 '기'는 무성음 '끼'가 되기엔 부자연스럽다. '꼬기'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고끼'는 너무 많이 다르다. 한국어에서 유/무성음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3. 외국인에겐 다 똑같은 ㄱ/ㅋ/ㄲ
유성음
무성음
단어의 첫 글자가 아닌 ㄱ
단어의 첫 글자인 ㄱ
ㅋ
ㄲ
한국어의 첫 번째 ㄱ이나 ㅋ/ㄲ는 모두 성대가 울리지 않는 무성음이다. 그러다 보니 외국인에겐 다 똑같은 소리의 범위로 들려서, 거센소리와 된소리 발음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발음도 어려워 한다. 원래 인간은 듣지 못하면 발음도 못한다. 오히려 어설프라도 흉내를 내는 게 대단한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여기서 한국인이 일본어를 배울 때 재미있는 논쟁이 발생한다. か의 발음을 '카'로 할 지 '까'로 할 지에 대한 논란이다.
일본어에서 '카'와 '까'는 구분하지 않는 같은 소리(か)의 범위 안이라서 의미가 없는 논쟁인데, 인터넷을 보면 한국인들끼리 논쟁을 하다가 '까로 발음되는 상황'이란 규칙을 만들어 낸 걸 간혹 볼 수 있다. 그런 규칙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인의 귀와 혀에서는 ㅋ과 ㄲ은 모두 k 발음의 범주에 있는 무성음이다. 일본어에서는 똑같은 소리이고 발음이다. 그러다 보니 그때그때 편한 쪽으로 발음이 되는 같은 범위 안의 발음을, 한국인은 강약의 차이로 나눠서 '카'나 '까'로 구분하는 것이다. 일본어에서 이런 구분은 아무 의미가 없다.
다시 한 번 확실히 말해 두자면, 일본어에는 한국식 된소리와 거센소리 구분이 전혀 없으며, 둘을 똑같은 소리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으로 발음하든 자신의 자유인데, 한국어 표준어의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か의 발음 표기를 '카' 단독으로 확정 짓고 있다. 물론 한국어에 없는 발음을 한글로 정확히 표기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유사한 표기일 뿐이다.
4. 한국인에게 어려운 유성음
한국인은 유성음과 무성음을 의도적으로 내지 못한다. 그래서 k와 g 소리를 제대로 발음하는 건 긴 훈련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국인의 잘못된 발음을 외국인들은 때려 맞춰서 듣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인도식 영어를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필자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본어 발음은 銀(ぎん, gin)과 金(きん, kin)의 구분이다. 둘 다 두 글자 길이의 짧은 발음으로 g와 k를 정확히 구분해야만 발음할 수 있는데, 한국어는 첫 번째 글자가 무성음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기'와 '키'는 외국인에겐 둘 다 'ki'로 들린다.
한국인이 듣기에 銀(gin)은 성대를 울리면서 나는 소리라 상대적으로 목구멍 안쪽에서 나는 묵직한 소리처럼 들리고, 金(kin)은 일반적인 한국어의 '기'나 '키'처럼 들리는데, 훈련이 쌓이지 않는 한 구분하기가 어렵다.
5. 일본어의 뭉개지는 비탁음
여기서 필자가 일본어를 배우던 초기부터 의문에 휩싸여 있었던 발음을 하나 더 들어보자.
1분 41초부터 발음되는 대사는 아래와 같다.
わが意志(いし)こそ、わが力(ちから)。わが力(ちから)こそ、わが意志(いし)。
와가 이시 코소, 와가 치카라. 와가 치카라 코소, 와가 이시.
나의 의지야말로 나의 힘. 나의 힘이야 말로 나의 의지.
처음에 발음되는 'わが(waga)'를 보자. ga는 여기서 유성음인데, 성대의 떨림 이후 소리를 코로 빼내는 콧소리가 된다. 그러다 보니 콧소리는 ㅇ받침처럼 들리고, 그 뒤의 유성음 g도 성대 깊숙한 곳에서 뭉개지면서 마치 '왕아' 처럼 들린다. 이 발음을 처음 접하는 일본어 학습자들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왜 が 발음이 ㅇ 발음처럼 들릴까?"란 의문 때문이다.
이런 발음은 콧소리가 난다고 해서 따로 비탁음(鼻濁音)이라고 부르는데, 전통적인 도쿄식 표준어에는 위의 예시와 같은 が행 비탁음이 존재한다. 도쿄 이외의 방언에서도 나타나는 지역들이 있다.
6. 마치며 : ㄱ/ㅋ/ㄲ은 g/k가 아니다.
왜 쓸데없이 이런 얘기를 길게 하고 있나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이 의문은 필자가 외국어를 공부하고서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서 얻은 해답이다. 외국어에 대해서 오랫동안 진지하게 생각하다 보면 누군가는 분명히 궁금해 할 것이다.
'김밥'이 'kimbap'이 되는 이유는 한국어의 첫 번째 ㄱ이 무성음 k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외국인은 거센소리와 된소리 구분을 한국식으로는 하지 못한다.
일본어의 か/た발음은 한국의 공식 외래어 표기로는 '카'와 '타'이며, 된소리 표기는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일본인 입장에선 거센소리(ㅋ)와 된소리(ㄲ)는 똑같은 범위 안의 같은 소리로 들린다.
우리나라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한글의 우수성을 주입 받으면서,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거의 모든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물론 상당히 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건 맞지만, 어디까지나 한국어 발음에 최적화 된 언어이다. 외국어들은 발음이 자음 모음 모두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컨대 L 발음조차도 ㄹ 받침과는 완전히 다른 구강 구조로 소리를 만드는 발음이다. 가끔 한국 가수를 보면 'angel'을 굴려서 '앤죨'처럼 발음하는 경우가 있는데, L의 발음이 다른 걸 모음의 발음 차이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다. 익히 알려진 f, th, v, r 같은 발음 등도 마찬가지다. 모음 역시 애플(apple)의 애[æ]와 엣지(edge)의 에[e]는 다른 발음이다. 이런 것들로 인해 유사해 보이는 발음도 언어가 다르면 느낌이 다르다.
언젠가 한 번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는데, 카테고리를 만든 김에 해 보았다. 누군가의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글이었으면 좋겠다.
외국어 발음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내 발음이 근본적으로 외국인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후 올바른 방식을 통한 아주 오랜 기간의 연습만이 발음을 바꿔낸다.
올바른 방식이 뭐냐면 발음을 만들어내는 혀와 이빨과 턱 등의 위치와 모양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혼자 하기는 거의 불가능해서 원어민 교사의 도움을 받아야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