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앞선 연재들에서 중세의 가족과 거주지와 종교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이야기했었다. 그에 이어서 이번에는 유럽인의 이름과 성씨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판타지 소설을 보면 가끔 읽게 되는 댓글이 있는데, 지구와 눈꼽만큼도 관련이 없는 다른 세상인데 유럽식 혹은 기독교식 이름을 쓴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유럽식 어감의 이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기독교식 이름을 보면 필자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필자는 판소 작가들이 기독교 이름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거기까지의 디테일은 바라지도 않고, 이 글 역시 그런 걸 말하려고 쓰는 글은 아니다. 그냥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재미삼아서 살펴보는 유럽 이름과 성씨랄까?
늘 이야기하지만 유럽은 넓은 영역이고, 각 지역과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다. 작명법도 서로 매우 다르다. 그래서 이 글은 기본적으로 서유럽 중에서도 영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예정이다. 왜냐하면 그게 창작물에서 가장 흔히 나오는 문화권이며, 작명법도 대략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유럽의 이름에 대해 다루고, 이후로 유럽의 성씨, 중국(동양)의 이름과 성씨를 다룰 예정이다. 정확한 순서와 내용은 현 단계에선 아직 정해두지 않았다. 쓰면서 조금 방향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1. 10세기 이전 중세 초반의 유럽식 이름
지난 연재들을 봐 오신 분들은 5세기에 시작된 유럽 중세 1000년의 역사가, 10세기와 12세기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단 걸 아실 것이다. 10세기 무렵엔 프랑크 제국이 분열하고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유럽인의 삶의 모습을 바꾸었으며, 12세기가 되어서 혼란기를 벗어나서 다시 사회를 재건하고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원래 유럽 지역에서는 두 가지 의미의 단어를 하나로 합쳐서 이름을 짓는 방식이 흔했다. 예를 들어서 옛 영국 왕들의 이름을 보면 Ætheling, Æthelwulf, Æthelred 같은 이름을 쉽게 볼 수 있다. 각각 다른 시기에 산 다른 왕들이고 Æthel이 무슨 성씨도 아닌데 반복되는 재미있는 경향을 보인다.
이유는 과거 유럽은 보편적으로 이름을 지을 때, 앞부분과 뒷부분의 단어를 붙여서 짓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앞부분 이름에 쓰이는 단어들과 뒷부분에 쓰이는 것들이 친족 안에서 어느 정도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다. 또한 신분에 따라서 주로 사용하는 이름 역시 정해져 있었다.
| 이름 | 구조 | 뜻 | | Ætheling 애설링[ˈæθəlɪŋ] | Æthel(귀족/고귀하다) + ling(~에 속하다) | 귀족에 속하다 | | Æthelwulf 애덜울프[ˈæðelwuɫf] | Æthel(귀족/고귀하다) + wulf(늑대) | 고귀한 늑대 |
뒷부분이 비슷한 유명한 이름인 베오울프(Beowulf)도 마찬가지다. 이건 벌(beo)과 늑대(wulf)라는 단어의 조합으로, '벌을 사냥하는 늑대'라는 뜻이다. '곰'을 돌려서 비유한 옛 유럽식 표현이다.
위의 이름들은 영어식 이름이지만, 로마 이후 서유럽을 지배한 것은 게르만족이다. 영국의 앵글로-색슨족이나 노르만족 역시 게르만족 일파였다. 게르만 느낌(?)이 가장 잘 남아 있는 독일권의 이름을 보아도 이건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아달베르트(Adalbert)라는 이름을 보면, '고귀하다'는 뜻의 adal과 '빛난다'는 뜻의 bert를 합친 이름이다. 사실 독일어권의 Adal은 앞서 본 영어권의 Æthel과 같은 단어이다. 같은 게르만족이라는 걸 이름에서 엿볼 수 있다. 참고로 Adal- 이란 단어는 Adel- 로 파생되었는데, 아델라이데(Adelaide)라는 여성 이름은 '고귀한 부류'라는 뜻의 게르만 기원의 이탈리아식 여성 이름이다.
| 이름 | 구조 | 뜻 | | Adalbert 아달베르트 | Adal(고귀하다) + bert(빛나다) | 고귀하고 빛난다 | | Adalhaid 아달하이트 | Adal(고귀하다) + heit(부류) | 고귀한 부류 | 아달하이트 → (변형) Adelaide 아델라이데
※ 10세기 신성로마제국 오토대제의 아내였던 '성녀 아델라이데(St. Adelaide)' 이후 널리 퍼짐.
여기선 그녀의 출신지인 이탈리아식 발음으로 읽었다. |
두 단어를 합치는 명명법은 서유럽이 아닌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서 영어식 이름 유진(Eugene)은 원래 고대 그리스 이름 에우제니오(Eugenios)에서 기원했는데, 'good'을 뜻하는 εὖ (eu)와 'born'을 뜻하는 γενής (genes)가 만나서 '잘 태어났다(well-born)'는 뜻의 이름이었다. 게르만, 그리스, 켈트와 같이 유럽 전반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명명 방식이었던 것이다.
옛 유럽의 이름이 두 단어 조합의 뜻을 가졌다는 건 꽤 재미있는 역사이다. 오늘날 우리는 '용감한 늑대', '현명한 부엉이' 같은 이름을 보고서 미국 원주민 인디언을 떠올리곤 하지만,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 사용했던 초기 이름의 명명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 뜻을 잊어버리거나 아예 실전되었을 뿐이다.
| 이름 | 구조 | 뜻 | | Wiljahelmaz 윌랴헬마즈(게르만어) | wiljô(의지/소원) +helmaz(투구/보호) | 의지의 투구/보호 | | Wiljahelmaz → 윌리엄(William) (영어) | | Wiljahelmaz → 빌헬름(Wilhelm) (독일어) |
이런 이름은 기독교가 득세하기 이전의 대략 10세기 이전까지의 주된 이름이었지만, 기독교식 이름이 득세한 이후에는 과거의 방식으로 두 단어를 조합해서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내는 전통은 서서히 사라져 간 것 같다. 그럼에도 '윌리엄'처럼 이미 만들어졌던 이름들은 살아남아 후대로 전해지고 변형되어갔다.
2. 기독교의 세례명이 이름이 되다
기독교는 4~5세기 무렵부터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세례명(Christian name)'을 부여하고, 기존의 성인(聖人)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것을 권장했다. 하지만 초기의 세례명은 방식이나 체계가 중세 후기와는 달라서, 베네딕투스(축복받은), 그레고리우스(신중하다) 처럼 오늘날 생각하는 일반적인 유럽인의 이름이 아닌 것도 많았다. 이 관습은 이후 500년 이상 사회 전체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기독교가 널리 퍼지는 10세기를 전후로 해서 유럽의 보편적인 이름이 세례명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본래 이름이 있고 세례명을 추가로 받는 게 아니라, 아예 아기가 세례식을 받을 때 성인의 이름을 따서 세례명을 본명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참고로 그 이전부터 기독교가 있었는데 왜 10세기부터 아예 풍조가 바뀐 건지 정확한 결론은 아직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서양 이름의 최소한 절반 정도는 기독교 기원의 이름이다. 예컨대 '요한'은 원래 그리스어로 요아네스(Ἰωάννης), 즉 '야훼는 자애롭다'라는 뜻으로 12사도의 한 사람의 이름이다. 이후 라틴어 요아네스(Iohannes)가 된 후, 구약에서 Johanan으로 표기되었다가, 영어의 John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사용하는 그 '존'이다.
아래는 '요한'에서 파생된 서양 이름들의 예시이다.
※ 아래의 파생 이름들은 중세에 한정하지 않고 적은 것입니다.
| 요아네스(Iohannes) | | 남자 이름 | 여자이름 | - 존(John)
- 숀(Sean)
- 셰인(Shane)
- 이안(Ian)
- 이반(Ivan)
- 잭(Jack)
- 제이크(Jake)
- 행크(Hank) | - 제인(Jane)
- 제이(Jay)
- 제니(Jeny)
- 자넷(Janet)
- 조안(Joan)
- 진(Jean)
- 조안나(Joanna)
- 한나(Hanna) |
'존'은 위의 예시들보다 훨씬 많은 파생 이름이 있고 다 적기도 힘들 정도다. 다른 예를 하나만 더 보자.
스타트렉에 보면 제임스 T. 커크 선장이 나오는데, 작중에서 친구들에게는 '제임스(James)'가 아니라 '짐(Jim)'이라고 불린다. 제임스와 짐은 모두 기독교의 제이콥(Jacob)에서 파생된 이름인데, 재미있게도 서양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원래 이름의 유래를 기억하고서 같은 이름이라고 인지하는 거다. (더불어 미국인은 애칭을 매우 좋아한다.)
참고로 제이콥은 히브리어 이름 야곱(יַעֲקֹב)이 기원이며, 야곱은 구약에서 아이작과 레베카의 아들이자, 이스라엘 12부족의 12창립자의 아버지이다. 본래 유대인의 이름이었다가 종교 개혁 이후 유럽에 퍼졌다고 한다.
| 야곱(Iacob) | | 남자 이름 | - 제이콥(Jacob)
- 제임스(James)
- 짐(Jim)
- 지미(Jimmy)
- 쟈크(Jacques) |
그 외에도 요셉(Joseph)이 조셉이나 조제핀으로, 이아손(Iason, 그리스 신화뿐 아니라 성경에도 나온다)이 제이슨으로 되는 등, 기독교식 이름 몇 개만 대충 봐도 이미 상당수의 서양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정말 웬만한 서양 이름은 반절 이상은 기독교 성인의 이름들인 것이다.
사실 이건 기독교 이름에서 파생된 이름의 숫자가 많은 것도 있지만, 결국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이름만을 쓰는 문화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오래 지속되다 보니 대다수 사람들의 이름이 기독교 이름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걸 알고서 보면 판타지 소설의 이세계(異世界)에서 기독교 성인들의 이름들이 줄줄이 나오는 게 거슬리는 사람이 나올 법도 하다.
중세 시대에 아이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지은 이유는 단순히 기독교 신앙에 대한 믿음 때문 만은 아니었다. 세례명을 받음으로써 기독교의 성인(聖人)들에게 더 강력한 보호와 가호를 얻기 위한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미신이 있었다.
당시 사회는 신과 천사, 성인들의 '신성한 힘'이 역경을 이겨내고 병자를 치유하고 구원을 이끌어내는 힘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죽을 병에 걸린 환자가 치유의 힘이 깃든 성자의 성유물을 보거나 만져서 '치유되기 위해서', 멀쩡한 사람도 힘든 길고 고된 여행길에 오르는 풍경은 매우 흔했다. 사실 중병에 걸린 사람이 희망을 거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소장된 14세기 성물함.
중세 사람들은 치유와 기적을 위해서 성자의 무덤이나 성물을 찾아 여행을 다녔다.
그런 시대에 세례명을 진짜 이름으로 짓는 문화에는,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성인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는 부모들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성인의 가호를 훨씬 더 강력하게 받을 수 있다는 '사회적인 상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남자 성인의 이름을 변형한 여성 이름들도 그렇게 많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존의 여성 버전이 제인이나 조안인 것처럼.
중세 시대에는 기독교의 각 성인들의 기념일이 매우 중요한 행사였는데, 그걸 네임 데이(Name Day), 우리말로 영명축일(靈名祝日)이라고 불렀다. 중세 유럽에서 보통 사람들은 생일을 챙기지 않았는데, 이유는 교회가 생일을 이교도의 관습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이교도 축제를 그렇게 했듯이, 생일 역시 영명축일로 대체해서 자기 세례명과 같은 성인의 이름의 날에 생일을 겸한 축하를 했다. 물론 왕이나 고위 귀족은 생일을 따로 챙겼다.
18세기 초 스웨덴의 성인 '이름의 날' 2월 달력.
저렇게 많은 성인의 날이 있었기에 충분히 생일을 대체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풍' 판타지 이세계에서 생일을 축하하는 건 유럽의 보편적 전통과는 맞지 않으며, 생일 케익을 마련해서 촛불을 켜고 축하 하는 건 더더욱 고증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런 관습이 널리 퍼진 건 19세기쯤 와서이다. 그 이전에는 케이크 정도가 매우 한정적인 지역에서 사용되었는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 생일 케이크는 아니었다.
▶[중세 서유럽의 이름(2) : 언어에 따른 변화와 별명과 애칭]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름과 성씨에 대해서 거의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쓰기 시작하니까 엄청 길어지고 있어 큰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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